중국침략 때 쓴 ‘조폭식 땡깡’ 떠올라
한국 해군함정에 대한 일본 해상초계기들의 위협비행이 지난 연말 이래 몇 차례 되풀이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의도된 도발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가장 편안한 해석은 총리 아베가 지지율을 끌어 올리기 위해 자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국내용 정치쇼일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보다 좀 더 심각하게 보는 전문가들은 아베가 다음 총선에서 자민당 의석을 대폭 늘려 개헌을 달성하고, 새 헌법을 통해 일본에 정식 군대를 창설하려는, 일종의 일본판 ‘북풍 공작’이라고 해석한다. 안보 위기감이 고조되면 아베가 대표하는 보수적 자민당은 참의원에서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 확보를 기대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 미국의 감수 아래 제정된 현행 헌법 아래서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게 돼 있다. 지금의 일본 자위대는 무장 공권력이라는 점에서 군대와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바깥 세력으로부터 일본이 침공 받는 경우 그 방어로 한정돼 있다. 자위대는 따라서 미국 등 동맹국을 도와 해외에 파병할 수 없고, 외국에 대해 선제공격할 수는 더욱 없지만 정식 군대가 설치되면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으로서는 불길한 일이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다행이고, 일본의 호전적 과거사를 돌이켜 볼 때, 가능성은 낮지만, 더 흉칙한 계략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필자는 가지게 된다. 일본에 병탄돼 35년 간 나라를 잃었던 한민족의 고통은 독자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신 비슷한 시기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와 중국을 삼키기 위해 보였던 야비한 행태를 되돌아 보자.
조선에 대한 군사적 간섭을 할 권리를 두고 청나라와 으르렁거리던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상대를 제압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1895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중국 땅 중 타이완과 랴오둥(遼東, 한국식 읽기 ‘요동’)반도를 일본 땅으로 편입했으나 러시아가 발끈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아시아 태평양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러시아는 이를 위해 필요한 연중 얼지 않는 항구(不凍港) 후보지로 랴오둥 반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차에 일본이 선수를 친 것이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3국 공동명의로 일본의 랴오둥 반도 병합을 극구 성토하고 이를 중국에 반환하지 않을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요구에 굴복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앙심을 키웠다.
러시아는 이 결과를 두고 생색을 내며 중국에 두 가지 이권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랴오둥 반도의 꼭지에 위치한 뤼순(旅順)과 다롄(大連) 일대를 조차(租借, lease)한 것이 그 첫째였다. 일본은 당초 랴오둥 반도 전체를 중국에서 떼어내 일본 영토로 삼은 데 비해 러시아는 그 일부만 활용하고, 그 영유권도 러시아 아닌 중국이 그대로 가진 채 돈을 내고 빌리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러시아가 챙긴 두번째 대가는 만주 일대에 러시아 돈으로 몇 가닥의 철도망을 건설해 운영하는 권리였다. 이 철도망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돼 있어 러시아와 랴오둥반도 꼭지까지 직행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쪽 종점인 블라디보스톡까지 열차가 만주 땅을 가로질러 운행함으로써 러시아 영토만 통과하는 경우에 비해 거리가 훨씬 단축되는 이익을 주었다. 이 철도망을 모두 합쳐 ‘청나라 동부의 철도’라는 뜻에서 ‘동청(東淸)철로’로 불렀다.
중국에 들인 러시아의 이같은 공은 그러나 몇 년 안 가 러일전쟁에서 패배(1905년)함으로써 절반 이상 물거품이 된다. 승전국 일본은 랴오둥 반도 끝부분의 세입자였던 러시아를 쫓아내고 대신 그 세입자가 됐다. 일본은 또 러시아가 건설해둔 동청철로 중 창춘(長春)~다롄(大連) 구간과 그 가지 노선인 선양(瀋陽)~단둥(丹東) 구간의 운영권도 러시아로부터 인수하고 그 노선 이름을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로 붙이는 한편, 랴오둥 반도 조차지에는 관동주(關東州)라는 지명을 부여했다. 관동주와 남만주철도 연변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은 본국 군대를 보내 주둔시키고 그 부대를 관동군이라 불렀다. 여기에서의 ‘관동’이란 ‘만주’를 지칭하는 중국식 지명이어서 일본 본국의 ‘관동지방’과는 상관이 없다.
1931년 9월 창춘 근교 남만주철도 선로에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그 강도는 경미해 쉽게 복구됐으나 관동군은 이 사고가 중국의 현지 군벌인 동북군 소행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발생 장소 근처 호수 이름을 따 류타오후(柳條湖, 한국식 읽기 ‘유조호’)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태를 발단으로 관동군과 일본 본국에서 증파된 병력이 함께 군사행동에 나섰다. 불과 몇 달 만에 만주 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1932년 3월 본국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 수립을 선포했다. 여기까지 일련의 사태를 일본은 만주사변이라 부른다.
류타오후 사건은 그러나 관동군 몇몇 장교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 현재의 국제연합(UN)이 결성되기 전 세계평화 지킴이였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이 사태의 진상조사 끝에 명백히 관동군 내부 소행임을 밝혀내고 일본군의 철수 요구안을 통과시켰으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 엄청난 사태에도 막상 중국 당국은 국제연맹에 진상조사를 요구한 것 외에 별 손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장제스(蔣介石, 한국식 읽기 ‘장개석’)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毛澤東, 한국식 읽기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내전을 벌이던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류타오후 사건 6년 뒤 이번엔 베이징 근교에서 비슷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시 이 곳에도 의화단(義和團) 운동의 결과로 일본군이 주둔했다. 의화단이란 중국 청년들이 외세에 저항해 1899년부터 2년 가까이 유지해온 자생적 조직이었다. 이들이 외국인을 상대로 적대행위를 벌이자 유럽 각국과 일본 미국 등 이른바 ‘열강’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베이징 근처에 주둔시켰다.
베이징 외곽에 소재한 루거우차우(蘆溝橋, 한국식 읽기 ‘노구교’)라는 교량을 사이에 두고 한 쪽에는 일본군 부대가 반대편에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어느 날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저녁에 정위치에 복귀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 부대 측은 중국군이 이 병사를 납치해 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날 밤 다리 건너 부대로 넘어가 수색을 벌이겠다고 중국 측에 요구했다가 거부 당하자 양쪽 간 총격전이 시작됐다. 당초 우발적 충돌의 모양새였고 교전상황도 치열하지 않았으나 며칠 사이에 양쪽 모두 엄청나게 병력을 증강했다. 일본이, 만주 아닌 중국 본토를 침략한 중일전쟁이 이렇게 시작됐다.
루거우차우 사건이라 불리는 이 해프닝의 진상은 아직도 불분명하지만 역시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다. 양쪽 간 총격이 시작된 시점에 문제의 일본군 병사는 이미 부대에 돌아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설사 자작극이 아니더라도 당시 중국 전체를 공격할 계획 아래 무엇이든 꼬투리를 찾던 일본이 이 사건을 이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중일전쟁은 판이 더욱 커져 태평양전쟁으로 비화했고 끝내 제국주의 일본은 패망했다.
지금 선진국에 가깝게 국력이 신장한 한국을 무력침략하기 위해 일본이 초계기 도발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발에 한국이 서투르게 대응했다간 전쟁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엄청난 함정에 우리의 모국이 빠질 것 같아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