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사무라이’ 흉내내는 아베 21세기 征韓論으로 갈까 걱정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 정치에서 자기 위상을 더 높이기위해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방 호족들끼리 100년이 넘게 힘겨루기를 하던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평정하고 최강자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출신계급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속으로 그를 깔봤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 무공을 세운 사무라이들에게 전통에 따라 땅을 나눠줘야했으나 그럴 토지가 부족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돌파하겠다며 조선을 침략했다. 그 뒤로도 일본지도자들은 국내문제가 꼬이면 이웃 조선 때리기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곤 했다.
도요토미가 죽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자신의 후손이 세습해 집권하는 새 정부 즉 막부를 에도(江戶,지금의도쿄)에 수립했다. 에도 막부는 외국과의 교역을 최소화하는 쇄국정책을 200년 이상폈으나 1853년 이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미국이 페리제독이 이끄는 해군함대를 보내 나랏문을 열라고 강압한 것이다.
페리함대에 이어 영국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도 포함(砲艦,gun booat)을 앞세워 일본의 개항을 거세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서양나라는 당시 일본인이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증기 기관군함을 몰고와 위협했다. 무력으로 이를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막부는 이들과 조약을 맺고 쇄국을 풀어야했다. 조약들의 내용은 일본의 권리보다는 일본이 상대나라를 위해 지켜야하는 의무를 주로 열거한 대표적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연히 전국 사무라이들의 여론이 들 끓었다. 국방이 최우선 책무인 막부가 그때까지 ‘오랑캐’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멸시하던 서양나라들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반(反)막부 여론의 중심에 섰던 논객이 근대 일본국수주의(요즘용어로우익) 정치관의 시조로 꼽히는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이다. 그는 고향인 조슈번(長州藩,현재의야마구치현)에 작은 사립학교를 열어 제자들을 통해 ‘존황양이(尊皇攘夷)’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자신의 신념을 전파했다. 이 말은 ‘천황을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 다시 말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새 정부를 세워 오랑캐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원래의 일본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그전 700여년간 천황은 정치권력을 쇼군(將軍)이라 불리던 막부 우두머리에게 내주고 일본 전통신앙인 신도(神道)의 수장, 즉 제사장 정도의 권위만 유지했었다.
요시다의 존황양이철학의 바탕에는 그 오래전부터 일부 학자들이 외쳐 온 국수적 민족주의가 깔려있었다. 이들 학자는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땅이어서 기후풍토면에서 살기 좋을 뿐 아니라 정치체제면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믿었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나라에서는 왕조가 쿠데타에 의해 수시로 바뀌면서 신하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주군을 찾아 거취를 정하는 일종의 떠돌이 노비신분인데 비해, 일본은 한번도 혈통이 바뀌지 않은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군주에게 신하들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안정된 체제라는 주장이다.
일부 일본인의 이런 믿음에 이웃나라가 상관할 일이 없지만 문제는 그 믿음 속에 이웃나라를 공격할 칼날이 숨겨져 있는 점이다. 요시다는 저서를 통해서 양과 맺은 불평등 조약때문에 일본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겠지만 당장이를 파기할 힘이 없으니 대신 한반도와 만주 중국을 복속시켜 잃은 것을 벌충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우선 그 중에서 쉬운 한반도(조선)부터 정복해야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외쳤다.
막부타도를 공개적으로 내 건요시다를 에도당국이 그냥 둘 리 없어 1859년 그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제자들이 동지들을 모았다. 조슈 다음으로 존황양이 지지가 강했던 사쓰마번(薩摩藩,현재의가고시마현)과 조슈가 동맹을 맺어 막부지지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써 1869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일단락됐다. 투쟁과정에서 ‘존황양이’ 중 ‘양이’부분은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이 자명해져 차츰 목표에서 사라졌다. ‘서양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력을 길러야하는 데이를 위해서는 ‘서양오랑캐’들로부터 더 많은 과학기술을 전수받아야한다는 모순 때문이었다.

천황중심의 새 정부가 구체제 청산을 위해 반드시 해내야했던 중대과제가 사무라이제도 폐지였다. 백만명의 사무라이들이 엘리트 계급이라는 자존심과 생계수단을 함께 포기해야할 상황이었다. 곳곳에서 이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대책으로 1870년대 정한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유신주역 중 한명으로 신정부요직을 맡았던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는 원래 사쓰마태생의 사무라이였다. 그는 사무라이 계급을 해산하고 국민개병제에 따라 징집된 장정들로 새 군대를 꾸려야한다는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일본의 오랜 기둥이었던 사무라이제도 폐지에 동의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전쟁을 통해 조선을 정복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는 조선을 침공할 명분을 만들기위해 자신이 직접 특사로 한양을 방문해 음모를 꾸미겠다고 자원했다. 현지에서 일부러 무례하게 처신한 뒤 조선인들이 격분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할테니 이를 빌미로 선전포고하면 된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오래된 그의 소원이었다.
새 정부는 그러나 아직 일본의 국력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이고의 계획을 채택하지 않았다. 실망한 그가 낙향하자 전국곳곳 사무라이들이 그를 따라 사쓰마로 몰려가 신정부에 대한 반란 에너지를 축적했다. 사이고 자신은 그가 수립했던 새 체제에 무력으로 대들 뜻이 없었으나 추종자들에게 떠밀려 그 리더가 됐다가 1877년 정부군과의 전투중 생을 마감했다. 미국영화 ‘마지막사무라이(The last samurai)’는 이 반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요시다쇼인의 고향 야마구치현은 일본 우익의 진원지다.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해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여러 인물들이 요시다의 제자였다가 메이지 시대의 주역이 됐다. 이토는 요시다의 참수형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현직 총리 아베신조(65)가 야마구치 출신이다. 그의 출생지는 도쿄지만 본적과 지역구가 모두 야마구치이고 윗대 조상들이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이 곳 토박이들이다. 아베는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요시다쇼인을 꼽는다. 아베의 외할아버지기 시노부스케(岸信介)는 태평양 전쟁전범으로 복역 중 맥아더사령부가 앞으로 일본정부를 친미화하기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보고 3년만에 풀어줘 1950년대 총리를 지냈다.
극우 성향 아베가 한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걸었다. 일본국민의 위기감을 높여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정도가 목표의 끝이 아닌 것 같다. ‘전쟁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헌법을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을 것 같다. 군국주의 의 부활과 정한론으로까지 갈 것이라는 예상이 기우가 되길 바랄 뿐이다.
끝으로 이 글을 쓰는 동안 필자가 느낀 갈등을 적지 않을 수 없다. 정한론을 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이 요시다쇼인이나사이고 다카모리를 침략원흉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두사람다 인간적면에서 높은 수양과 내공을 쌓은 인물이었다. 한국의 돌팔이 정객들이 연구하고 본받을 점이 많은 인물들이지만 지면관계로 기술을 생략하게 돼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