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2차대전을 일으켰다가 패한 독일은 그 죗값으로 나라가 분단됐었다. 같은 시기 아시아 태평양에서 유럽전쟁 못지 않은 큰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지고도 분단되지 않고 일본침략의 피해자인 한국이 두동강났다 .어찌된일인가?
이 당연한 의문에 시원한 대답을 내놓는 한국인이 뜻밖에 많지 않은 것 같다. 한일관계 역사인식의 중심이 돼야할 이 물음이 무슨 까닭인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필자는 한국이 일제식민 통치기간에 겪은 고통과 손해의 양보다 이어진 분단, 전쟁 그리고 그 이후 지금껏 지속되는 냉전과정에서 겪은 아픔과 상실이 더 클것이라 생각한다. 아베를 필두로 한 일본 극우세력들이 현재 한국을 상대로 폭력적 경제도발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식민지배한 과거사가 오히려 한국을 위해 잘한 일이라고 우기며 끊임없이 한국을 때린다. 한국민 모두가 한반도 분단의 경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런 뻔뻔함에 대응하는 이론무장이 된다.
소련은 자국과 독일사이에 1941년 전운이 감돌자 그 대비책으로 일본과 불가침조약(중립조약)을 맺었다 .당시 일본도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소련과 우호관계가 필요했었다. 소련은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직후인 1945년 8월 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일본공격에 나섰다. 그 6개월전 연합국인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 정상, 즉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소련의 얄타에서 만나 유럽전쟁이 종료되면 소련도 일본 무너뜨리기에 동참하기로 비밀협약을 맺었었다.
당시 미국입장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었지만 7월이 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극비리에 진행해 오던 원자폭탄 개발이 완료 된 것이다. 미국입장에서 소련 도움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으나 그렇다고 비밀협약을 없었던 일로 하기도 곤란했다. 이런상황에서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며칠이 드라마보다 더 숨가쁘게 흘러갔다. 8월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 투하, 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9일 새벽 소련군의 만주 방면 진격개시, 9일 낮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 투하, 그리고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항복했다.
일본이 원폭 두 발 때문에 항복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실은 소련의 참전이 핵무기 못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일본 수뇌부는 승산이 없는 전쟁임을 이미 몇달전부터 깨달았지만 무조건 항복 아닌, 협상을 통한 종전이 돼야한다고 믿고 소련에게 그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해 둔 참이었다. 소련은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끝내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자 일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이 관철시키고자 했던 마지막이자 유일한 종전 조건이 천황제의 존속이었다. 소련까지 적국으로 돌변한 마당에 하루라도 빨리 무릎을 꿇어야 이 조건 관철에 유리하다고 일본은 판단했다. 공산혁명을 외치는 소련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뒤, 즉 발언권이 세진 뒤 항복하면 천황제가 용인 될 리 없다고 본 것이다.
소련의 군사 행동 개시 다음날(일본시간8월11일) 일본은 천황제 존속만을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비밀리에 미국에 전했다. 그날 저녁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에서 행정부 전쟁관련 3개 부처 대표들이 종전 뒷처리를 일사불란 하게하기 위한 밤샘회의를 열었다. 소련과의‘ 전리품배분’도 긴박한 의제였다.
태평양 전쟁에 불과 며칠 기여한 소련에게 유럽에서 독일 영토의 절반을 맡겼던 것 같은 선심을 쓸 의사가 없었던 회의 참석자들은 한반도 북쪽을 소련 점령지로 하고, 일본 본토와 한반도의 남쪽 절반은 미국이 점령하자고 일사천리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배석한 두 육군대령에게 당장 옆방으로 건너가 한반도 허리부분에 경계선을 설정하도록 지시했다.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곧 한반도로 남하할 것이 예상됐기 때문에 반도 중간쯤에서 진격을 멈추도록 소련 정부에 시급히 미국 구상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두 대령은 당시 조선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다. 조선인 지도자나 미국인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들을 시간도 없었다. 이들은 한반도에 관한 변변한 지도도 못 구해 잡지 내셔널지오 그래픽에 실린 지도를 보며 반도를 대략 절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보이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자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했고, 소련의 스탈린도 동의했다. 북한사람을 포함한 한국인들에게 70년이 넘게 피눈물을 쏟게 만든 분단이 이렇게 확정됐다. 38선을 그은 두 군인 중 한 명의 이름은 딘러스크, 다른 한 명은 찰스 본스틸, 나이는 서른 여섯 동갑이었다. 후일 앞사람은 국무장관을, 뒷 사람은 주한미군사령관을 역임했다.
일본은 1945년까지 반세기에 걸친 군국주의 시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외 영토를 유린하고 점령했지만 패전과 함께 이들 점령지는 모두 원상회복 됐다. 유럽국이나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일본에 점령된 곳은 원래의 종주국에 반환됐다가 곧 독립했고 ,타이완과 사할린은 원래의 영유국 품에 되돌아갔다. 다만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는 분단이라는 새로운 재앙을 맞이 했는데 이 중 베트남은 1975년 통일되고 한국만이 분단국으로 남았다.
일제 점령지 중에서 한국은 가장 처절하게, 가장 긴 세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일본 항복 며칠 전 벼락치기로 결정된 한반도 분단에 관해 그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거대한 불행의 시발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간접 책임을 져야한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오랫동안 한일간 공식수교가 이뤄지지 않다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무상청구권자금과 2억달러의 차관을 공여받는 조건으로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됐다. 당시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일본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난과 함께 ‘대일 굴욕 외교 중단’ 을 외치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했었다. 그러나 이때 받은 합계 5억달러의 돈으로 포항제철,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등이 건설돼 한국경제 개발에 큰 도움이 됐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수 많은 국민이 끼니걱정을 하던 그 시절 한국의 박정희 정부가 거센 비난을 참으며 이뤄낸 한일 국교 정상화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필자는 인정한다.
다만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더해 분단과 전쟁이라는 고통까지 떠안았다는 역사인식을 당시 한국정부가 가졌더라면 더 좋은 조건으로 국교 정상화를 관철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한일 협정 규정에 따라 일본이 주는 돈은 전액 일본산 산업기기와 중간재 그리고 일본인이 제공하는 용역 등을 사들이는데 써야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한국경제의 대일의존 성향이 여태 시정되지 않은 점도 한국이 반성해야 될 점이다. 이 잘못이 지금 일본이 폭력적 경제 도발을 하는 배경이 됐다.
한일협정 조항 어디에도 일본이 건네는 3억달러가 무슨 명목인지 언급이 없다. 그냥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한국에게 3억미국달러 상당의 무상지원을 한다고만 기술 돼 있다. 역대 한국정부는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배상으로 이를 받았다고 이해하려했지만 일본자민당정부는 자국민들에게 “독립축하금”으로 준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합병은 잘못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으니 배상금은 줄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일본우익의 역사인식이다.
금년 초 일본자위대초 계기들이 잇달아 국해군함정에 근접비행했던 사건도 이번 일본의 경제도발과 맥락이 이어진 것으로 필자는 의심한다. 그때는 한국 해군이 일본초계기에 위협적으로 레이더파를 쏘았다고 우겼고 이번에는 일본산 전략물자가 한국을 통해 북한에 유입되기 때문에 대한 수출을 규제한다는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일본 안보가 한국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가짜뉴스를 통해 일본인들의 기감을 키우려는 일본판 북풍공작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