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국이 북한 핵의 인질로 잡혀 있는데도 그 안위는 안중에 없는 듯 미국 트럼프는 곧 군사행동에 들어갈 것처럼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으니 걱정스럽고 분노가 치민다.
생각 같아선 미국이든 남한이든 나서서 신출귀몰하는 특공작전으로 우리와 가치관이 너무 다른 김정은을 제거하고 핵 시설도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만화 아닌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남한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은 채 북한을 무력공격하는 방책이 있다고 미국 국방장관은 말했지만 여러 전문가들이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미국이 북한을 먼저 공격하면 북한은 미국 아닌, 지척의 볼모를 해칠 것이 뻔하다. 핵무기라면 말할 것도 없고, 재래식 무기인 장사정포(長射程砲)를 서울로 쏘더라도 남한 측 대응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엄청난 손실이 벌어진다. 또 이는 국지전 아닌 3차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힘에는 힘이라는 논리에 따라 남한에도 미군의 핵을 들여오거나 남한 자체로 핵을 개발해야 된다는 얘기들이 한국 내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는 미국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선택이다. 미국이 남한 핵을 용인하는 것은 자신들이 힘이 없어 북한의 핵보유를 막을 수 없다고 자인하는 굴욕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과거 미군이 보유한 소형 핵무기들이 배치돼 있었으나 노태우 정부 시절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철수했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의 합의로 북한을 비핵화하고 대신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주고 받는 이른바 빅딜 얘기도 나오고 있으나 이 역시 미국이 그 동안 자신들의 정책이 잘못됐음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
내키진 않아도 대화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인 듯한데 트럼프는 오늘 밤에라도 전쟁에 나설 것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는 협상에 대비한 장삿군식 엄포라고 생각되지만 혹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나 큰 전쟁으로 번질까 조마조마하다. 트럼프가 ‘수 천 명이 죽더라도 그 곳(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상관할 것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전언은 특히 한국인의 억장을 무너지게 한다. 이 말은 지난 달 공화당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이 트럼프와 만났을 때 들은 얘기라고 언론에 밝혔었다.
미국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 주었고, 그 뒤 국가 재건에 큰 도움을 준 고마움을 한국인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이 아무 의무나 책임이 없는데도 그냥 베푼 자애로움은 아니다. 분단과 6.25, 그 뒤의 냉전과 지금의 북핵 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겪는 고통에 관해 상당한 책임이 미국에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서 2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그 죄값으로 나라가 동독 서독으로 양분돼 오랫동안 아픔을 겪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에서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했지만 분단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 침략의 피해자였던 한국이 분단됨으로써 2중의 피해자가 된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소련은 2차대전 당시 유럽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싸웠지만 1941년부터 일본과 연합국 간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에는 발을 들이지 않다가 막판인 1945년 8월 8일에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으니 소련은 겨우 1주일 일본과 전쟁을 치렀지만 그 항복 결정에 소련 참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 소련 선전포고, 다음날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숨가쁘게 상황이 전개되면서 흔히들 일본이 원자폭탄 때문에 항복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원폭보다 소련 참전이 더 결정적 변수였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1945년 봄 일본의 패색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짙어 지면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본 여러 유력인사들 입에서 나왔지만 전쟁 지휘부는 이를 미뤘다. 이는 어차피 패전은 불가피하지만 한 두 군데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종전 협상을 벌여야 그나마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생각했던 가장 중요한 종전 조건이 천황(天皇)제의 존속이었다. 이런 판에 소련 참전은 일본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공산혁명을 외치는 이 나라가 패전 일본에 대해 천황제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항복하자는 결정이 이래서 내려졌다.
미국-영국과의 사전 밀약에 따라 소련군은 극동지역 일본 점령지, 즉 만주 사할린 조선(한반도) 등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맡고, 일본 본토에는 미군이 진주하기로 했다. 선전포고 한 시간 뒤부터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만주로 진격했다. 며칠 뒤면 한반도로 진입할 기세였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자국 군인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소련에게 거들어 달라고 간곡히 권했었지만 막상 소련이 동참할 무렵에는 입장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7월 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해 실전배치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제 공산국가 소련 도움 없이 핵으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은 미국은 소련의 거침 없는 진격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8월 10일 일본은 천황제 존속만을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미국에 전했다. 그 날 저녁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에서 고위 당국자들이 일본의 항복을 일사불란하게 접수하기 위한 밤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배석한 두 육군 대령에게 한반도 전역을 소련에 맡기지 않고 일부는 미군이 장악할 계획이니 당장 옆 방으로 건너가 양쪽의 경계선을 설정하도록 지시했다. 두 군인 중 한 명의 이름은 딘 러스크, 다른 한명은 찰스 본스틸, 나이는 서른 여섯 동갑이었다. 후일 앞 사람은 국무장관을, 뒷 사람은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두 대령은 당시 조선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다. 조선인 지도자나 미국인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들을 시간도 없었다. 이들은 한반도에 관한 변변한 지도도 못구해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지도를 보며 반도를 대략 절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보이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자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했고, 스탈린의 소련도 여기에 동의해 한반도가 분단됐다. 이 38선이 6.25를 거치면서 변형된 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38선을 경계로 소련군과 미군이 나눠 진주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분단이 고착됐고 따라서 이는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뒤로 한국사회 내부 갈등과 중국 소련(지금의 러시아) 등의 입장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패전 후 한반도를 처리하는 여러 옵션 중 소련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미국에게 분단 책임의 일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미국 우선(America first)’만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