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미국 정상회담이 끝났다. 비핵화를 실행하는 구체적 프로그램을 공동선언문에 담지 못했고, 깜짝쇼같은 재밋거리도 없어 싱거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참으로 중요한 만남이었다. 지구상에는 미국이 근년까지 혐오 또는 멸시했던 나라들이 북한 리비아 이라크 쿠바 등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악마시했던 나라가 북한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나서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했고, ‘깡패 나라(rogue country)’라 불렀다. 그런 나라의 지도자를 트럼프가 만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역사적 대(大)전환이다.
근세사에 식민 통치를 받아 본 나라야 많지만 해방과 함께 국토가 분단되고, 양쪽이 동족상잔 내전을 치렀으며, 그 뒤로도 험악한 대치를 계속한 3중 4중의 불행을 겪은 경우는 베트남과 한반도뿐일 것으로 생각된다. 베트남은 이미 통일됐고 유일하게 남은 분단 한반도가 이제, 당장 통일은 아닐지라도 전쟁 걱정을 덜게 됐으니 얼마나 감격스런 진전인가? 게다가 지금 이뤄지는 변화는 냉전의 마지막 잔재를 씻어낸다는 세계사적 의미도 크다. 한반도의 비핵화가 달성되면 한국과 북한은 전세계의 비핵화를 요구할 도덕적 정당성도 갖춘다.
지난 회 연재에서 북한이 1993년 핵확산 금지 조약(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조성된 1차 북핵 위기가 이듬해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일단락됐음을 설명했다. 이 합의는 미국이 남한을 따돌리고 북한과 담판해 이뤄냈는데 이는 남한 대통령 김영삼이 워낙 대북 강경론자여서 협상에 방해가 된다고 본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들여다 보자.
제네바에서 대화가 진행 중이던 1994년 4월 김일성이 사망했다.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짧은 성명을 내는 한편 제네바에 나가 있던 북-미 회담 미국 측 대표들로 하여금 현지 북한 대표부에 설치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도록 했다. 반면 남한 정부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발동해 긴장을 돋궜다.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정부가 조문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가 호된 비난을 받았다. 제네바 협상의 미국 측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는 그 때 미국이 최소한의 예의로 북한을 감동시켜 이후 회담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회고하며 남한 당국의 굳은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국정원 전신 안기부가 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 강명도가 탈북해 한국에 들어왔고,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이 이미 다섯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당시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 때까지 폭탄을 완성하진 못한 상태였다. 북한의 최초 핵실험은 그 12년 뒤였다. 북한과의 대화에 찬 물을 끼얹은 이 안기부 발표에 미국 당국이 항의하자 남한 당국은 문제의 탈북자가 소문만 듣고 한 얘기였다며 물러 섰다. 탈북자는 한국 정보기관의 신문 때 대북 강경론자가 듣고 싶어하는 진술을 해주려는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제네바 합의는 타결 후 불과 2주일만에 좌초했다. 미국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 여소야대가 되면서 행정부가 대북 약속을 지키려 해도 의회가 가로막은 것이다. 북한은 약속대로 핵개발을 중단했으나 미국 측 약속 이행은 지지부진이었다. 이렇게 9년을 끌다 2003년 북한이 NPT 탈퇴를 다시 선언함으로써 제네바 합의는 없었던 일이 됐다. 이로써 다시 조성된 긴장 국면을 제2차 북핵 위기라 부른다. 위기의 원인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고 하고, 미국은 어쨌든 제네바 합의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북한이 일방적으로 NPT를 탈퇴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이었다.
새 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이번에는 북한 남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6개국이 한 자리에서 문제를 풀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6자회담(Six-party talk)이라 불리는 이 시도도 타협의 실마리가 풀리는 듯하다가 다시 꼬이기를 거듭했다.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 상대방을 탓했다.
그 사이 북한이 핵무기 기술을 축적하면서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졌다. 최악의 해가 작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연말까지 7개월 동안에만 무려 열 한 차례 북한은 핵 또는 미사일 실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6개월. ‘늙다리 미치광이’와 ‘꼬마 로켓 맨’이라 서로를 호칭하던 김정은과 트럼프가 손을 잡았다.
실은 남한이 북한보다 10년 이상 앞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1969년 닉슨 대통령은 앞으로 동맹국의 방어를 위한 미국의 기여를 줄이겠다는 외교 방침을 밝혔다. 닉슨 독트린이라 불리는 이 원칙에 따라 미국은 1971년 한국 주둔 미군 중 1개 사단을 철수했고, 그 뒤 몇 년 사이에 베트남에서도 완전히 발을 뺐다. 이같은 변화에 불안해진 한국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미국 모르게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으나 뒤늦게 이를 안 미국이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한국에 대한 일체의 안전보장을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물러섰다. 박정희는 미국에서 정권이 바뀌자 또 한 번 핵 개발을 시도했으나 시해 사건으로 백지화됐다. 전두환 정부도 같은 시도를 하다 역시 미국의 제동으로 없던 일이 됐다. 미국은 남한의 핵무장을 막은 대신 미국의 핵으로 유사시 한국을 도와 준다는 이른바 ‘핵우산’ 제공을 약속했다.
남한의 경제력이 1975년 북한을 추월했다(지난 회 연재에서 이 시기가 1980년 대라고 썼으나 오류였다). 1980년 대 들어 북한의 우방이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한에는 주한미군이 보유한 미국 핵무기가 들어와 있었고,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정기적으로 실시됐다.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은 70년 대의 박정희와 똑같은 동기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갔다. 90년 대 들어 북한의 전통적 우방 소련과 중국이 남한과 수교함으로써 북녘 지도자들의 핵무기 집착은 더욱 굳어졌다. 가난한 나라가 적은 돈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방법이 핵이다.
6.25가 나던 해 태어난 필자는 초등학교에서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라는 애국 동요를 불렀고, 군 복무 때는 “때려 잡자 김일성” 구호를 외쳤다. 유년기 필자가 상상한 북한 사람 모습은 머리에 뿔이 나고, 눈은 충혈된 괴물같은 것이었다. 남북 관계에서 남한이 의심의 여지 없이 강자의 지위에 오른 이제 북녘 사람도 남녘 사람과 유전자 풀(pool)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이 남한이나 미국을 향해 최근 까지 퍼부은 거친 언사는 악에 바친 약자의 절규같은 것이라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반도 문제를 한국인 주도로 풀 수 있을 것이다.
독일 통일 전 20년 간 서독은 동독에 매년 평균 20억 달러 씩, 심지어 동독이 안 받겠다고 했는데도 지원했었다. 또 서독은 미국이 자국에 미국 핵무기를 배치하려 했을 때 이 핵을 동독을 목표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동의했었다. 이런 배려가 쌓여 동독인의 민심이 서독으로 돌았고 끝내 양쪽의 경계선은 피 흘림 없이 무너졌다. 요 몇 달 간의 정세 변화를 보고 곧 통일이 될 것처럼 경거망동해선 안 되지만 북한과는 대화가 안 되니 그들이 스스로 무릎 꿇고 빌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냉전보수 사고 방식은 더 큰 문제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