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공산권은 붕괴, 中과 蘇는 ‘한국 사랑’ / 고립무원 김일성 ‘핵만이 살 길’

특별기고_ 북핵 이해 밑거름(上)

이제 며칠 뒤면 세계인의 주목 속에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지금 북핵 문제가 지구촌 언론의 중심 화두다. 모국을 떠나와 있는 Today’s Money독자들이 회담을 지켜보기 전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두 차례로 나눠 그 배경을 짚어 본다. 오늘 그 첫 번째 글이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난 뒤 지구상에 세계대전급 전쟁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미국을 리더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리더로 한 공산주의 진영이라는 두 덩어리로 나뉘어 수 십 년 간 전쟁 때나 다름없는 살벌한 이념 대립을 벌였다. 양쪽이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며 여차하면 핵무기로 공격하겠다는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이 식은 땀 나는 긴장 국면을 ‘차가운 전쟁’이라는 뜻에서 ‘냉전(冷戰, cold war)’이라 불렀다.
이런 국제 정세가 1988년부터 2-3년 사이 급격히 변했다.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혁명이 폴란드에서 처음 일어났고, 곧 헝가리 등 동유럽 다른 공산권에서 비슷한 급변사태가 잇달았다. 공산 동독이 서독에 흡수합병되는 독일 통일도 이 때 이뤄졌다. 대부분 무혈 혁명이었다. 끝내는 1991년 말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마저 붕괴됐다.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소멸한 것이다.
40여 년 냉전 체제가 이렇게 끝났지만 지구상에서 공산주의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국과 북한 베트남 쿠바 그리고 아프리카 몇 나라 등이 공산주의에 뿌리를 둔 정치 체제를 여태 유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이 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불안해졌다. 게다가 가까운 중국에서도 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란 반체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이들 사태 말고도 김일성은 몇 가지 불길한 조짐을 느끼고 있었다. 남한에서 88년 집권한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北方) 정책이란 이름으로 펼친 진보적 외교 행보가 그 첫째다.
노태우는 그 때까지 북한의 친구이자 남한의 적이라고 여겼던 소련 및 중국과 수교를 시도해 1990년과 1992년에 각각 성사시켰다. 노태우 정부는 한국이 이들 두 나라와 수교하고 동시에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게 되면 한반도 정세가 안정되면서 관련 모든 국가들이 ‘윈 윈’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북한 교차승인’이라고 불린 이 방식을 노태우 정부는 실제로 미국과 일본에 권유했었다.
당시 미국은 자기네 나라가 이미 공산당 정부의 중국과 수교했는데다 소련과도 화해 국면으로 접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이 이들 두 나라에 접근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북한에 뿌리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는데다 곧 그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 보고 수교를 거절했다. 김일성 입장에서 보면 자기네 친구 두 나라는 한국과 수교했는데 한국의 친구들은 자기네와 안 놀겠다고 나온 셈이다. 북방정책 자체는 북한을 보듬겠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결과에서 김일성은 ‘대동강 오리알’이 됐다는 좌절감을 느꼈다.
김일성을 불안케 한 또 한 가지 변화는 남북한 간 경제력의 역전이었다. 분단 이래 40년 가까이 북한의 GDP가 남한의 그 것을 앞질렀으나 1980년대 들어 상황이 뒤집히고 해마다 격차가 커져 갔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됐듯 북한이 남한에 빨려들 것이 우려됐다.
1992년 2월 김일성은 자신의 국제 담당 비서를 비밀리에 워싱턴에 파견했다. 이 특사는 워싱턴 당국에 북한과 수교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렇게 해주면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수교 요구는 이미 잘 알려진 북한의 숙원이었지만 후자는 획기적이자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새 제안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과거 노태우의 남북한 교차승인 권유를 거절했을 때와 같은 이유로 이를 묵살했다. 김일성은 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 몇 달 뒤 북한의 핵 실태를 사찰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 나라의 핵무기 개발이 의심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향후 특별사찰을 추가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북한은 일찌기1960년 대부터 소련에게 핵발전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소련은 자칫하면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해 오다 뒷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북한이 가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었다. 영변 원자로가 이렇게 해서 건설될 수 있었고, 이 원자로를 기반으로 북한은 1980년 대 은밀히 핵무기 개발에 들어 갔었다. NPT 가입국들은 핵시설을 무기 개발에 활용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IAEA가 실시하는 사찰을 받을 의무를 진다.
추가로 특별사찰이 필요하다고 한 IAEA 보고서에 발끈한 북한이 NPT를 탈퇴하겠다고 1993년 선언했다. 미국이 자기네 나라를 승인해 주지 않으니 스스로 핵무장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책이라는 신념을 굳힌 것이다.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은 NPT에 가입도 하지 않은 채 핵개발을 완료했고, 미국은 이를 눈 감아 줬는데 왜 자기네 나라에만 미국이, 그리고 그 영향을 크게 받는 IAEA가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대들었다. 실은 이 논리에 관해 미국은 지금도 설득력 있는 반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NPT 탈퇴로 핵개발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힘에 따라 조성된 긴장 국면을 제1차 북핵 위기라 부른다. 이제 미국이 애가 달아 북한 달래기에 나섰다. 전직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가 북한으로 찾아가 김일성과 면담함으로써 가까스로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끌어 들였다. 당시(1993년)는 빌 클린턴 정부가 출범한 첫 해이자 한국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첫 해였다. 김영삼은 대단한 대북 강경파여서 북한과는 대화가 안 되며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북한을 굴복시킬 때만 달성된다고 믿었다. 이를 아는 워싱턴 당국은 한국 몰래 북한과 물밑 대화에 나섰다.
미국-북한 간 긴 협상 끝에 1994년 10월 이른바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경수로(輕水爐) 방식 원자로 2기를 북한에 건설해 주며 미국-북한 간 수교 협상을 3개월 내에 시작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북한의 기존 원자로와 달리 경수로 방식에서는 쓰고 난 핵연료를 재처리해 핵폭탄 원료로 사용할 수 없다.
제네바 합의는 그러나 불과 2주일 만에 미국 쪽 사정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다. 의회 중간선거에서 야당인 공화당이 압승한 것이다.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수교협상에 들어가는 것을 여소야대 의회가 완강하게 막았다. 북한은 그러나 경수로 완공을 기대해 핵개발을 접은 채 기다렸으나 이마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2001년 공화당 부시(아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새 행정부 국무차관이 지금 트럼프 백악관의 안보 보좌관이자 초강경 북한 불신론자인 존 볼턴이었다. 그가 증거력이 떨어지는 정황을 제시하며 북한이 핵개발 중단 약속을 이미 깼다고 주장함으로써 제네바 합의는 최종적으로 물거품이 됐다. 볼턴은 이번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강경 주장을 내놓아 트럼프로 하여금 회담 취소 발표를 하도록까지 사태를 악화시켰었다.
미국과의 수교와 체제 보장은 북한에게 참으로 절박한 과제다. 김일성이 1992년 미국에 밀사를 보내 이를 요청했음을 이 글에서 이미 적었지만 이후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도 북한 권력서열 2위로 꼽혔던 조명록을 2000년 미국에 보내 같은 요청을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에 응해 북한 방문까지 계획했으나 몇 달 뒤 대선에서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 감으로써 없던 일이 됐다. 이번에는 김일성의 손자가 이 문제를 놓고 트럼프와 만난다.

황용복 칼럼facebook_todays mo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