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조선 운동가 3인의 삶 조명
한국에서도 #MeToo 운동이 힘을 내기 시작한 것 같다. 현직 여자 검사가 남성 상사로부터 성 추행 당한 사실을 지난 달 털어 놓은 것이 기폭제가 돼, 이후 각계에서 비슷한 사례들이 잇달아 폭로되고 있다. #MeToo 운동이란 성폭력, 성희롱 등의 경험을 공유해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여권 신장 캠페인의 한 갈래로 지난 해 미국에서 시작됐다. ‘나 역시’라는 뜻의 영어 ‘Me too’를 소셜 네트워크 상의 표제어(hash tag)로 사용한다.
한 세기 전 일제 치하 조선에서도 여권 운동에 앞장선 여성들이 있었다. 지금도 힘든데 100년 전 조선에서 이 운동의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까? 이제 소개할 20세기 초 여권운동 대표 인물 3인의 삶은 실제로 소설보다 더 처절했다. 문인, 언론인, 화가 등의 길을 걸으며 공통적으로 여권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일제시대는 물론,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절에도 정부와 대중으로부터 단지 ‘몹쓸 여자들’로 무시 당했다. 이 때문에 원고와 그림 등 이들의 활동 흔적은 많이 멸실됐다가 80년 대 이후 재조명을 받으면서 조금씩 복원되는 중이다. 이 글에 나오는 팩트는 복원된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한국어 본에서 주로 인용했다.
김명순(金明淳, 1896-1951년)
‘탕녀’ 낙인에 짓뭉개진 끼
문인, 언론인, 배우 등으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김명순은 구한말 관료이자 평양 부근 지주였던 아버지와 그 첩 사이에서 1896년 태어났다. 열 한 살 때 경성(서울)으로 가 진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913년 열 일곱에 다시 도쿄로 유학해 한 여학교에 편입했으나 2년 뒤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 때의 사연이 평생 그녀를 짓누른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다.
당시 명순은 역시 평안도 출신 조선인으로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이응준(李應俊)과 도쿄 시내 한 숲에서 데이트하던 중 그로부터 강간을 당해 그 충격으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가 구조됐었다. 당시 언론은 그녀가 이응준을 짝사랑하다 실연 당해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도했고,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이를 근거로 퇴학처분했다.
경성에 돌아간 명순은 소설가로 등단했다. 독립운동가 최남선이 발행한 잡지의 작품 공모에 입선한 것이 계기가 됐는데, 그 심사위원이 춘원 이광수였다.
명순은 1919년 다시 도쿄로 건너가 김동인, 전영택 등 조선 문인들과 함께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며 작품활동을 하다 2년 뒤 귀국했다. 이후 그녀는 문학 활동 외에 매일신보 기자로도 활약했고, 몇몇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여권운동에도 나섰다.
이 때가 그녀 일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재능을 발휘하던 시기였으나 조선 사회, 특히 남성 문인들은 박수를 치기는 커녕 오히려 침을 뱉았다. 후배 문인 김기진(호 八峯)은 한 잡지 기고를 통해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이성을 너무 많이 알고 지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김명순은 무절제하다고 비난했다. 더 큰 충격은 그녀와 문학 동인이었 김동인이 가해 왔다. 그는 명순을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 전(金姸實 傳)’을 통해 그녀에게 신여성인 척하는 탕녀라고 낙인을 찍었다.
1939년 마흔 셋의 명순은 도망치 듯 일본으로 다시 건너 갔지만 글은 제대로 못 쓰고 허드렛일로 끼니를 때우면서 정신병에도 시달렸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여비가 없어 귀국을 못하고 있다가 55세 때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현역 화가이자 평론가 김병종은 저서 ‘화첩기행’에서 이렇게 썼다. “김명순은 문학을 통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여성을 억압하는 온갖 종류의 모순된 구조와 전사(戰士)처럼 싸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도처에 꽃향기 대신 피냄새가 진동했다…그녀가 자신을 변호하고 옹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학 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명순을 성폭행한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한국군 대령 상당) 계급으로 태평양전쟁 종전을 맞았다. 그 3년 뒤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자 그는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전역 후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 ‘국가유공자’로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년)
항일에도 앞장 섰던 여류화가
한국의 몇 안 되는 제1세대 여류화가 중 한 명인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의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진명여학교를 마친 직후 일본으로 유학했다.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18년 귀국한 뒤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앞장 섰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옥고를 치른 뒤 이듬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혜석은 화가로서 빼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조선 미술인을 대상으로 한 연례 미전인 선전(鮮展)은 물론 일본제국 전체를 대상으로한 제전(帝展) 등에서 특선을 비롯해 여러 성과를 쌓았다. 그녀는 글 재주도 뛰어나 결혼하던 해 염상섭 등 문인들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해 소설 등을 실었고, 여러 매체에 여권신장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김우영은 혜석과 결혼 후 변호사에서 외교관으로 전신, 만주 주재 일본영사관에 발령 받았다. 당시 일제는 외교관들의 사기 진작책으로 선진국에서 장기 연수할 기회를 주었다. 김우영 부부도 이 혜택을 받아 1927년부터 2년 간 외유에 나섰다. 이들이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유부녀 혜석과 현지에 유학 와 있던 최린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최린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옥고를 치른 뒤 천도교 지도자 자격으로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 스캔들 때문에 혜석 부부의 10년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다. 실은 혜석이 최륜과 일을 벌이기 전 김우영이 먼저 바람을 피고 다녔었다. 혜석은 이혼 후 최린과 동거에 들어 갔다가 몇 년 안 가 이 관계도 끝났지만 이 때는 이미 그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화냥년’으로 굳어져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혜석을 항일 전력과 관련해 전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려 놓고 있던 차에 이혼 사건이 터지자 그녀를 퇴폐의 상징으로 매장하려 들었다. 혜석이 생계를 위해 연 작품전시회들에는 관람객 발길이 끊겼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끼니 때우기도 어렵게 된 40대의 혜석은 여승(女僧)의 길을 걸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들을 전전했다. 그녀는 이 무렵 파킨슨병과 우울증 등으로 고통을 받다 1948년 서울의 한 시립병원 행려병자 병동에서 52세 나이로 이승을 하직했다.
김일엽(金一葉, 1896-1971년)
女僧으로 생을 마친 자유연애주의자
소설, 시, 수필 등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김일엽은 평안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한 불행을 겪었으나 외가의 도움으로 큰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아 이화학당 중등부와 역시 이화학당 대학부 예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일엽은 22세 때인 1918년 내키지 않은 첫 결혼한 뒤 바로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여자 유학생으로 동갑이던 김명순, 나혜석과 친구가 됐고, 춘원 이광수와도 알게 됐다. 일엽의 본명은 ‘원주’였으나 그녀의 글재주를 알아 본 이광수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전설적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 一葉)처럼 될 것이란 기대로 ‘일엽’이란 필명을 붙여 주었다. ‘이치요’의 한국식 읽기가 ‘일엽’이다. 이 이름은 뒷날 그녀가 출가했을 때 법명으로도 쓰였다.
도쿄에서 그녀는 또 조선인 시인 임장화도 만나 연애 끝에 첫 남편과 이혼하고 동거에 들어갔다. 자유연애주의를 내걸었던 김일엽은 이 두 명 외에도 여러 남자들과 결혼 또는 동거 관계를 맺었다.
1920년 귀국한 일엽은 김명순, 나혜석 등과 여성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해 여권운동에 나섰다. 김활란, 이광수 등도 이 잡지의 고정 기고자였다.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일엽의 남자들 중 그녀가 가장 사모했던 이는 1920년 대 말 동거했던 불교학자 백성욱으로 알려졌다. 백성욱은 그러나 어느 날 ‘우리의 인연이 다했다’는 편지를 일엽에게 남기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출가했다. 이를 계기로 일엽은 자신도 같은 길을 걸을 결심을 굳혔다.
일엽은 1933년 출가해 예산 수덕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 때 이 절 큰 스님이 수행에 방해 되니 독서와 글 쓰기를 중단하라는 분부를 내려 일엽은 실제로 20여년 절필했다가 1950년 대 다시 붓을 들었다. 1962년 간행된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는 당대의 베스트 셀러이자 문인 지망생들의 필독서가 됐다.
<황용복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