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단어일까. 집착의 시작은 관심이고 관심이 더해 가면 점점 우리의 눈을 밝게 해주는 호기심도 생길 것이다. 따라서 집착하고 있는 대상 외에는 시시하게 느껴지고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온 정신을 그곳에 쏟고 몰두하며 행동하게 된다. 집착이 점점 심해가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그렇다고 처음처럼 계속해서 흥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멈출 수도 없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그 생각의 이론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천여 명에 하나 만여 명에 두 명이라고 할 정도라고 옛 선지자들의 지론이 있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세상살이 다 그렇지” 하면서 가슴에 보듬어 안고 무덤까지 끌고 가고 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눈에 보이는 일들을 바꾸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의지와 행동이 따로 놀 게 됨을 보면서 절망하게 되고 더욱더 깊이 빠져들어 가면서 걱정과 죄의식과 두려움을 함께 동반하는 삶을 유지해 간다.
그렇다면 집착이라는 단어가 왜 내 삶을 그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고 옴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을까? 집착은 일종의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집착은 이해하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원죄 “라고도 하고 서양에서는 “에고(egoism)” 라고도 한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에 환경이 합세를 하고 그런 성향으로 진행되어 갈 뿐이며 마음이 심약하고 성격이 좋지 않고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약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체질을 타고 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기가 걸리고 배가 아프고 때로는 중병에 걸리듯이 습관이 그렇게 들어 버린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어느 부분에? 결핍이 있는 부분 즉 몸의 취약한 부분에 병이 나듯이 내 자신이 궁핍하고 모자라서 집착에 매진하게 되어있다 .
나에게는 과연 무슨 집착이 있었을까?
내 나이 26살에 남편을 만나고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도박으로 새벽에 들어와서는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나를 왜 기다리느냐 영자(남편의 여동생)하고 같이 자면 되지” 난 그때부터 남편을 내가 바꾸어서 새 사람을 만들어 놓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그 일에 집착하여 살아온 세월이 30년을 넘게 그러고 살았다. 그 집착으로 치열하게 싸움도 하고, 설득도 해보고, 밤을 새워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남편 바꾸는 일에 꽂혀버린 것이었다. 내 말이 옳고 나만 정의롭고 내 주장이 맞다고 아우성 쳤지만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으며 나를 따르라고 했지만 아무도 나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빈정거리며 나를 힐난했던 남편과 자녀들에게 나의 입지는 거꾸로 곤두박질 쳐졌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더 멀리 내 곁에서 멀어져만 갔다. 집착의 행보는 또 하나의 분열을 조장하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거절당하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더 맹렬하게 집착했다. 남편이 도박을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 는 온밤을 꼬박 새워 가면서 불안해하다, 미워하다, 비난하다, 기도하다, 새벽녘에는 어둠을 가르고 성당에 새벽미사를 갔다. 어언 40년 전의 일이이니까 그때에는 차도 없었고 겨울아침의 찬바람은 어찌 그리도 살을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였던지,,,,,,, 쇼핑백안에 남편의 구두를 넣고 가서는 성당 맨 구석에 앉아 구두를 꺼내놓고 미사 첨례를 한다. “하느님! 구두는 왔지만 사람은 못 왔습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든 지켜주시고 노름하는 것 안하게 해 주시고 집에 일찍 들어오게 해 주이소” 집에 들어오면 목숨 걸고 싸우고 싶어서,,,,,,,, 그러고는 누가 볼까봐 구두를 챙기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 후의 내 삶의 행보는 어떠했을까?
삶의 변화라면 우리는 서로 깊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집착이라는 정신의 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남편의 모든 행동만이 문제라고 여기고 저지하려들고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망상의 나날이 계속되어갈 뿐이었다. 정녕 그때 이런 프로그램을 알고 또 내가 병을 앓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먼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모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고, 인연과 우연이란 것이 있고 달도 차야 기운다고 했던가? 나 역시 나의 의지로 해볼 만한 일은 다 하고나서 바닥을 치고 갈 때까지 가보고 나서야 그런 일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 난 미워하고 비판하는 일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계속하면 남편이 고쳐질 줄 알았다. 난 참 망상의 대가였고 착각의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 집착은 또한 그렇게 나타난 나의 성향과 배우자와는 다르다고 비난했던 그 부분이 맞부딪혀 결핍에서 오는 습관과 성향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취미생활도 집착으로 치달을 수 있다 .
어떤 취미를 갖고 있든 자신의 취미를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인간관계에서 위험신호가 될 수도 있고 생활에 도움보다는 해악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이것이 취미생활의 집착이다. 또한 나에게는 다른 결핍에서 오는 집착도 있었다.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는데 집착했고 자녀를 키워가면서 나의 학벌이 미흡하다고 느껴 자녀들의 학습을 과도하게 밀어붙이게 되는 집착이 있었다.
이 병은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걱정과 죄의식과 두려움이었다. 내 생활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마음이 약해서도 아니었고 성질이 더러워서도 아닌 병을 앓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모든 원망과 미움과 억울함은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에서 오는 문제이다. 그 생각에서의 자유로운 삶의 길은 내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걸까? 아니다, 이전과 일어나는 일은 똑같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고 하는 마음이 오래 머물지 않고 없다고 해야 할까?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그 생각에 더 이상 뭔가 붙지 않는(분별 판단) 그것뿐인 마음이 있을 뿐이다. 전에는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으면 그곳에 코를 박고 다른 것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 비위에 맞는 데로 맞추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기도하는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
신의 뜻이 나의 뜻에 맞추어 지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번뇌이고 갈등이며 병인 줄도 모르면서,,,,,그러기에 생각의 집착은 불가항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올라올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체험이라는 본성을 확인한 후에는 삶에 힘든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안목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어떠한 좋은 일이 있다고 한들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는 못한 일이다. 그것은 이렇고 저렇고 할 “나” 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 주장을 해야 할 때 할 수 없다거나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상의 모든 일은 그대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고민하고 집착하는 일이 별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릴 때가 많아진다.
내 삶에서의 실용적인 변화는 무엇인가?
누군가의 충고를 달갑게 받아들여 본적이 있다 내 삶에서는 희귀한 일중의 하나이다. 이전의 나의 삶에서는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고 그러기도 싫은 일이었다. 남편에게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말고 내가 어제 밤에 친구와 오랫동안 통화한 일과 그 내용에 대해 충고해 주었다 . 난 잠시 아주 부끄럽고 난처했다. 하지만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보! 어젯밤 전화하는 도중에 지적해주지 않아서 고마웠어요. 그래요 내가 좀 잘못했네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어요.”이처럼 누군가의 나에 대한 불평과 충고에도 감정에 끌려가는 일이 줄어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유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
난 나의 집착을 알면서 나 자신과 중독자인 배우자에게 감사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난 나를 몰랐을 것이다. 나에게도 남편 못지않은 집착이 있었다.
즉, 사람들과의 관계중독, 상대방을 끈질기게 고치려는 집착,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에게 내가 바랐던 것- 내가 직접 나의 문제를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식으로 그들을 속이고 조종하려 했는지 때로는 화를 내고 섹스를 이용하고 돈을 이용하고 죄책감을 심어 주면서 이용 했는지 상대방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했다.
결국 내가 알게 된 것은, 내 뜻대로 하려는 것에 대한 무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눈으로 바라본 세게는 남편과나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과 마음 생각의 아픔 모두는 낫겠다는 의지아래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감사를 노래한다. 어느 누구라도 내가 허락 하지 않는 한 나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 나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