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생각의 움직임과 분별이 잠들기 전까지는 행해지는 일이고, 그러기에 살아 있다고 말할수 있으며 자면서도 계속되는 일은 꿈으로 생각이 연장되어가고 있다. 잠들기 전의 생각도 사실은 꿈을 꾸는것과 같은 일이다. 그 생각의 분별이 깊이 뿌리박힌 습관인지라 원도 한도 없이 생각하고 비판하고 계산하고 살았건만 만족할만한 때는 드물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생각에서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설정과 기대가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설정에 미치지 못할때는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하고 때로는 상대를 비판하면서 마음을 상하게 되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진하고 있다.
그 생각이란 것은 물의 물결과 같아서 물결의 모습만 다를 뿐이지 그냥 물인것처럼 마음도 생각이라는 모양으로 이런 저런 현상으로 나타날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의미를 부과시키면서 좋은 물결 나쁜 물결로 구분 지우듯이, 생각을 잡고서 이건 좋은 생각이니 기분이 나아지고, 나쁜생각은 끊어서 없애버리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결단의 조치를 취하여 좋은생각 내 맘에 드는 생각으로 바꾸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 일은 망상의 연속이고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처럼 설정과 기대는 욕구와 욕망이 되어 허울좋게 꿈이니 이상이니 하면서 우리의 삶을 충동질한다. 난 적어도 이래야 돼, 이정도는 돼야 되지 않나? 지금까지 유지해오던 상태의 우아함을 무너뜨릴수는 없지… 등등의 자기보호본능과 자기표현 방법을 유지하려고 무척이도 애를 쓴다. 그러기에 자기자신의 욕구와 욕망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왜 어려워졌는지, 무슨문제로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헤메고 있는지는 알아보려고도 하지않는 실태이다.
그러면 나의 문제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까운 사람이 지적하고 나에대해 싫어하는 점이다. 그것이 나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때 변명하고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하거나,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고 설득하려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나자신의 허물을 안다고 해도 상대에게 지적 받고 비판 받았을 때 기분이 좋은 사람은 거의없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생각의 전쟁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그 전쟁에서 헤메고 살 것인가의 갈림길이 여기에 달려있다. 그때 내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미세한 찰나이다. 예를 들어 “저 인간 죽이고 싶도록 밉다” 그걸 부인하지 말고 “딴 생각으로 마음을 바꿔먹어야지” 라고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상태를 본다는 것이다.
또한 나쁜 생각 좋은생각으로 구분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 순간 찰나가 지나면 또 다른 생각으로 이동해 가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좋은 것을 취하려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버리려고 한다. 이 때는 이미 평온은 천리나 만리나 멀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이런 이론들은 천지에 널려있다.
그럼에도 끊어지지 않는 생각은 어떤 연유로 지속이 되는 것일까? 또 다른 경우는 내안에 풀어내지 못한 억울이가 표출되지 못해 헤메고 있을 때이다. 앞에서 말한 인간관계의 설정과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 맘에는 억울이와 약함과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함께 훅 하고 치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건 젊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양상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거진 비슷한 현상으로 들어나는 것 같다. 그 현상으로서 나이가 들어감에 있어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은데 가까운 이들로부터 소외감과 멀어짐을 느낄 때 그 빈자리 증후군이 생각이 많아지면서 서러움과 북받치는 화를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생각이란 놈이 수시로 맘을 덜 쑤셔댄다. 그래서 바쁘면 좀 나아질까 해서 여행도 가고 취미 생활도 해본다. 집안 일도 더 꼼꼼하게 해보려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병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몸이 불편하여 생각이 많이지는건지, 생각이 끊기지 않아서 몸에 영향을 끼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만과 두려움이 삶에 배수진을 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문제가 뭔가 있긴한데 그걸 마땅히 찾아서 이름 붙일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가족들이나 가까운 인연들이 나에 대한 걱정과 불만이 있다는 그것이 나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 문제를 찾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 생각이 끊기지 않는 이유가 되고 상대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소통의 길은 오래 전에 막혀있었고 깊은 골이 파여있는 관계 속에 답답함이 자신의 삶을 끌고 왔던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도 나의 연륜과 경험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고 나의 생각을 주입시키고 싶어하며 내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권위의식과 그 격전에서 지기 싫고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웬만하면 자신들이 지고 살고 참고 산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No” 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죽을때까지 이 일을 자행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식과 정보와 여건이 해결해 줄꺼라 생각하고 그 곳에 매진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혼자서 마음을 바꿔먹는 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먼저 경중을 본인 스스로 따질 일도 아니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치료가 우선시 되어야 하며 이런 분야의 일을 해결하는 상담사나 자조모임 단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인만을 위한 자조모임단체가 생겨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어느날 딸이 집에 와서 남편과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걱정스런 마음과 설득하고픈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때 난 나의 진심이 무언지를 생각했다. 순간 스치는 마음이 딸의 어려움도 보였지만 남들이 알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함께 출동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잠시후 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창피함을 무릎 쓰고… “딸아! 남편하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참고 어떻게하면 이렇게 되지않을까 연구도 해보고 살아볼 생각은 않고 남편과 헤어지면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며 누가 더 자존심에 피해를 보는지 그런 것만 생각하면서 보따리 싸는 생각부터 하는 것이 어쩜 그리도 에미를 닮았느냐? 나도 너의 아빠하고 살면서 골백번을 더 보따리 쌀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네. 그런데 딸아! 난 이혼하고 돌아가서 살 집이 없었고 친정엄마도 없어서 그냥 살았단다.”
딸은 아무 말없이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서는 “엄마 나 우리집에 갈래” 하고 떠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난적이 있었다. 그날 내가 한일은 설득도 아니었고 걱정과 가르침도 아니었다. 단지 나의 진심과 부끄러운 일을 고백했을 뿐이었다. 생각의 꼬리를 자르는 일은 진심으로 나를보고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인정하고 실감하는 일이다. 그것은 혼자서 하루밤에 기왓집 열두채를 짓는 생각의 이론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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