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돌보기와 소통의 부재

이번에는 전에 소재로 다루었던 소통에 대해 좀더 자세히 다루어 볼까한다.
가족이 됐든 친구와 이웃 간이든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간관계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삶의 큰 숙제로 대두되어 왔다. 부모와 자녀 부부 또 그들의 자녀와의 관계가 만만치만은 아닌듯 하다. 그 결과로 가족 친구 직장 사회의 어느 소속이나 그룹과의 소통이 부담과 힘겨움의 현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하나의 예로 소통의 불통으로 가장 큰 문제가 개개인의 독립적인 생활의 홀로서기가 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서로 의존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몸은 한 공간에 있으되 똑같은 소재와 내용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기에 새로운 내용의 소통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는 육적인 독립을 서로가 두려워 하고 있다. 자신과의 소통이 되지 않는 아직 덜 자란 성인  자녀인 의존하는 남편 아내 의존하는 부모 자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고 소통도 되지않으면서 서로 붙들고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부는 결혼한 독신 생활이며 부모와 자녀는 무늬만 가족일뿐이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과의 소통의 독립이 되지 않으면 육적인 독립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독립에는 소통이 가장 기본이다. 우리는 소통에서 상대를 알게 되고 상대에 의해서 나를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철저하게 자신을 보는 눈은 장님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소통 하면서 자신을 돌볼 수 있는가?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알고자하는 원의가 있어야하고 나의 문제를 내어놓고 직시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누군가가 나에대해 말을 할때 받아들이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은 삶이 녹녹하고 살만하다 싶을 때는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이 역경과고난 가운데 있지 않고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난 지금 이렇게 말할수 있다. 어떤이는 내게 “저주를 하시오” 하고 말한 적도 있다. “지금 형편이 좋지 않다. 숨을 쉴수 없을 정도로 가깝하고 답답하다” 이 때가 “호기”라고…. 그리고 그럴 때에 고단위 항생제를 처방 받을 수있는 절호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고 문제가 더욱더 견디기 힘든 일일수록 인생역전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찾은 나의 문제는 상대방의 행동을 어느 것도 잘 봐주지 못하고 그들의 말을 수긍하면서 들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조금 다른 각도로 보게되면 먼저 나 자신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나를 못봐주고 나의 소리를 못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나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고  이웃이 나의 그런 점을 비판해 주지 않았다면 끝내 모르고 살았으리라 나에게 있어서 관계형성은 먼저 관심을 갖고 그 다음 비판하고 계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었다.
그것이 나쁜 일이란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다는걸 알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 문제는 그냥 해결되는 일이고 나아가 자신과의 소통이 이루지고 타인과의 소통도 풀려 나갈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은폐하거나 부정하거나 자신을 원망하고 비관 하고 또는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소통과 자신 돌보기는 집을 떠나 아련히 먼곳에서 헤메고 있다고 봐야한다.

자신을 속이면서… 그러면 어떻게 은폐하며 속이는가?
아주 교묘하다 니에게는 이런종류의 집착하는 일이 있었다. 남편보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의 집착이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하는 일보다 내가 하는 일이 더 나아 보이고 남편처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큰 장점이라고 은근히 나를 자랑하고 유세를 떨면서 살았었다. 그래서 미련스럽게 집안일을 하고 기도하고 잠을 자지 않고 음식을 장만하고 …..
얼마나 내세울게 없었으면 이런걸 가지고 유세를 떨었을까?
그러면 그렇게 한 일들이 나쁜 일인가?

나쁘다는 말을 하기위해서가 아니다. 그 일들은 그렇게 할수도 있고 해야하는 일들이었다.
단지 문제라면 왜 이런걸로 굳이 유세를 떨면서 우월감에 취해 남편의 기를 꺾어 놓고 싶어 했으며 나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것이 누구의 문제인지 ?

이 일이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를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는 소통의 부재였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위에서 말한 그런 부분에서 나와 같지않은 사람들을 보면 비판하고 흉보고 쓸데없는 우월감에 취해서 나만 뭘 잘하는 사람 좋은사람으로 남기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자신에게 끼친 피해는 무기를 넘어서서 흉기를 휘둘렀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통의 부재는 과잉으로 치닫고 집착과 의존으로 물꼬를 틀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 자신 돌보기가 없음으로써 구멍난 내 삶의 빈 자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이 잘 보이고 판단하고 그러고도 석연치 않아서 날을 세우고 나 자신마져도 가혹하게 비판하니 다른 사람 판단하는일이야 오죽 했으랴.

나 자신 돌보기가 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않는다 그건 내가 나에게 가혹할때 남의 단점이 잘 보이고 고쳐주고 싶어한다. 그것은 내가 통찰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가 똑똑해서도 아니다. 나의 상태가 좋지않은 때라고 보면 된다. 나의 단점과 내면을 인식 하여 보게되면 상대방의 단점은 비록 보였다고 해도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고 자신의 독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럴때 우리는 받아들임과 거절의 선택과 용기가 주어진다.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는 길이며 그 길은 걸어가볼만한  가치있는 길임을 감지하게 된다.
자기돌봄과 소통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관계회복의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일은 아주 방대하고 어려운 일인것 처럼 느낄수도 있지만 어떤 형식이나 모습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루지못할 일일수도 있다. 다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대한 편견과 비판보다는 내어놓고 인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결핍과 외적인 모자람을 채우는 것도 생각일뿐이지 진실은 아니기에 그것을 채우기위하여 어느 특정한일에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 ! 가족과 이웃이 있다는 것 !
이 일들은 나 자신 돌보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눈에 거슬리고 못마땅한 상대는 더 큰 변화의 선물이 될수도 있고 그사람으로 인하여 나의 본능적인 반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수도 있다. 난 특별한 공부를 하지않는다. 내 삶이 공부이다. 또한 대학에서 전공을 한일도 없다. 요즘와서 굳이 전공과목을 말하라면 “자신돌봄” 과목이랄까?
나의 자신돌봄은 내가 홀로서기의 독립된 삶을 영위할수있게 해주었고 남편과 세자녀들 그리고 나와 인연맺은 이웃들은나의 삶에 공부할 꺼리를 제공해주는 귀한 스승들이다.

우리부부의 관계유지는 서로가 자신과의 소통으로  자신을 어떻게 돌보면서 살아가는지를 상대방에게 투영된 자신을 보면서 서로에게서 배워가고 있다. 그 과정은 참으로 경이롭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면서 특별히 할일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할일이란 것은 계산하고 비판하고 조종하며 거짓으로 포장하는일을 말한다. 때때로 세상에나가 자신없어 하면서 움추려들고 불평으로 방어하는 딸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지금 자신없어하고 두려워하는 그일을 시작해 보라고 억울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시간에 만약 시작할 수 없다면 그 핑계의 종류만큼 불평과 비판과 열등의 강도도 그만큼 늘어 날거라고 어느날 딸이 물어왔다.

“엄마 자신과의 소통이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난 바로 대답이 나왔다 나의 체험에서… 그런 사람은 남을 미워하는 시간이 아주 짧다. 그리고 그 미움이 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경에 금언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내가 바라는것을 상대에게 그대로 해 주어라” 자신돌보기하는 사람은 조금 각도를 달리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봐주고 그대로 해 주어라” 우리의 오감에서 이런 저런 반응이 물결치듯이 일어날때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일이다.
나 자신에게 먼저 어디가 어떤지 먼저 관심갖고 물어봐주어야하고 보살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과의 소통이다 함께해주신 구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 돌보는 공부로 편안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다음글은 계속 올라오는 감정에 붙들려 생각이 멈춰지지 않을때의 여러상황들에 대해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