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안, 남기고 온 여운 (1)

인간의 호기심은 보이지 않는 사물에서 비롯된다. 저 바다건너, 저 산 넘어, 저 숲 속에, 저 건물 안에, 저 사람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그래서 사람은 ‘가지 않은 길’을 기꺼이 걸어간다.
돌이켜 보면 한 세상 사는데 대학 학사학위면 충분할 공부를 몇 년 더 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무슨 허영심이나 학구열 때문은 아니었다. 석사공부는 무얼 할까? 박사 공부는 어떻게 할 까? 궁금했다. 마치고 나면 뭐, 별 것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허전해지기도 했다. 때로는 공부에 돈과 시간을 투자한 것이 아깝게 생각될 때도 있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기분이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통이다. 30대 초반에 몇 달 해외연수로 맛본 미국생활의 호기심이 50대 초반에 기어이 나를 북미, 캐나다로 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짧은 해외연수 경험이 아니었다면 ‘내 사는 곳이 편하고 좋지’하는 생각에 한국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 생각은 어떤가 해서 대학 신입생 때 ‘워킹할러데이(여행하면서 일하는 프로그램)’를 몇 달 보냈더니 나중 해외이주의견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서 무난히 캐나다에 소프트랜딩(안전착륙)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변했고, 젊은이들의 꿈은 무한해졌다. 유명한 K-Pop그룹 방탄소년단이 2019년 6월 초 영국 런던의 윔블리에서 6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공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 비틀즈나, 퀸, 마이클잭슨 같은 팝의 거장들이 서던 꿈의 무대. 그 무대를 자랑스러운 우리 젊은이들이 한국어로 노래 부르며 관중들의 혼을 빼 놓았다. 해서 아직도 ‘뭐니뭐니해도 한국이 제일 좋지’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마치 조선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따르는 유생들을 보는 듯하다.
아주 외국에 나가서 살라는 것이 아니다. 견문을 넓혀 세상과 맞장 뜰 용기를 기른 후 한국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는 것을 서울에서 부산쯤에 거주지 옮기듯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캐나다의 교민청년들도 한국에 가서 봉사도 하고 일도 하고 온다. 하나 되는 ‘지구촌’. 청년들만이 평화롭고 살기 좋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각설하고, 산 후안 버스관광코스의 마지막이 ‘산 펠리페’성 앞이었다.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먼 발치에서 바라보니 스멀스멀 호기심이 온몸을 감싼다. 성벽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좀이 쑤신다. 게다가 오전에 일찌감치 산후안 시내관광을 끝내고 배에 올라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는다. ‘나도야 간다. 나의 이 남는 시간을 낮잠으로 보낼 소냐.’ 깨달음에 아내를 재촉해 다시 하선한다. 크루즈 정박장 앞에서 택시를 타고 펠리페 성을 탐사하기로 한다.
산 펠리페 성의 공식 이름은 ‘카스티요 산 펠리페 델 모로(Castillo San Felipe del Morro)’. 1508년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1539년 바위절벽인 ‘모로(지명)’위에 대포진지를 구축하면서 성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카스티요는 영어로 성(castle), 산은 성자(Saint)이다. 그렇다면 펠리페란 사람은 성자인가? 아니다. 중세시대 유럽왕가 중 가장 영향력 있던 합스브르크 왕가에서 1527년 5월에 태어나 1598년 사망 시까지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공동통치)의 왕을 지냈으며 개신교를 반대하고 가톨릭을 옹호하는 종교정책 때문에 성인(Saint)의 칭호를 받았다. 산 펠리페 성의 이름은 그를 기려 명명되었다. 오늘날 ‘필리핀’이라는 국가명의 유래도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스페인 최 전성기 시절의 통치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산 펠리페 성은 산후안 국립 역사유적지 중의 하나이다. 당연히 입장료를 받는다. 미국 달러로 1인당 $7. 매표소 직원이 성 내부 지도를 준다. 여섯 구역으로 나눠진 성내는 각 구역마다 안내판이 있어 찾기 편하다. 수입의 많은 부분을 관광에 의존하는 나라답다. 500여년 전의 옛 성채, 그것도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침략자들이 지어놓은 성채 하나로 이제는 원주민, 이주민 구분 없이 돈벌이를 한다.
카리브해를 마주하고 있는 감시 초소는 원형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 주변 성벽 곳곳에 대포를 설치해 두었다. 1493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때 발견된 푸에르토 리코는 1508년 그 유명한 폰세 데 레온이 스페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약탈이 행해졌다. 원주민인 타이노(Taino) 족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1511년 폭동을 일으키며 거센 반항을 했지만 활과 창으로는 총과 대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중남미 원주민들의 표정은 참 슬퍼 보인다. 캐나다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술과 도박과 마약. 이런 것들이 내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의 도피처였다. 자연히 치료제로 쓰던 코카인을 현실 도피를 위해 심취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날 푸에르토 리코에서 재배된 코카인은 미국으로 밀반출된다고 한다. 2017년에는 18년간 마약밀매를 해 온 교통안전 국의 전, 현직공무원들과 공항직원들이 공모하여 1천 150억어치를 거래한 것이 적발되었다. 성으로 올 때 탔던 택시의 늙수레한 기사가 산후안은 마약밀매가 주 수입원이라고 냉소적으로 내뱄던 말이 상기된다.
우여곡절 끝에 1511년 산 후안 도시가 건설되고 이 도시를 적의 침략으로부터 막아내기 위해 바다에 연한 암벽 지역 여기저기에 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790년 현재의 모습으로 산 펠리페 요새가 완성되기 까지 영국이 두 차례, 네덜란드 가 한 차례 침공했다. 그러나 모두 거뜬히 물리쳤고, 스페인은 오랫동안 이 지역을 식민지 상태로 유지했으나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 지역을 미국 자치령으로 헌납하게 된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일상생활에서 쓰인다.

스페인 군대가 생활하던 이 요새에는 과거의 우물, 침실, 부엌, 심지어는 감옥까지 잘 관리되어 오고 있다. 고향을 떠나 무덥고 바람 부는 섬나라에 와서 청춘을 보냈을 젊은 스페인병사들을 생각하니 문득 내 군대시절이 생각난다. 그것도 신병훈련소에의 생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