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관

예전에 내가 썼던 글을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하고서 복사를 하고 그것을 스크랩해 두었는데 세월이 지나가니 복사잉크가 날아가서 글씨가 흐릿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냥 두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 내 소중한 지난날의 솜씨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여기 U-레이디 에 재생해 보았다. 배경이 1980년대 초, 중반이므로 현재 상황과 일부 불일치 하는 점이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필자 주]

 

“복창! 나는 미 8군에서 온 사나이다.”
“——–”
“복창! 어. 이 새끼 봐라? 복창 안 해?”
훈련조교가 오른쪽 발을 들어올려 마악 강성규의 쪼인트(정강이뼈 부분)를 깔려는 순간이었다. 남들이 좌향 좌 할 때 실수로 우향 우를 했다고 이렇게 사정없이 다그치다니—. 강성규는 도리 없이 알량한 그의 자존심을 포기하기로 했다.
하긴 이 삭막한 황산벌(논산)에서 작대기 하나(이등병)도 하늘같이 보이는 새카만 훈련병이 자존심 내세우며 하느님 같은 조교 앞에서 버팅 겨 보아야 이로울 건 하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나—. 나는 미 8군에서 온 사, 사나이다.”
“다시 복창! 내가 왜 이럴까? 쥐약을 먹고 물을 안 마셨나?”
“내, 내가 왜 이럴까—”
“소리가 작다. 30연대 훈련병은 죽만 먹는 사람 없다! 다시 복창!”
“내가 왜 이럴까? 쥐약을 먹고—”
“더 크게!”
“내가 왜 이럴—”
“이 호랑말방구 뼉다구야. 이거나 먹어!”
조교의 정글화 신은 육중한 오른쪽 발이 강성규의 왼쪽 쪼인트를 정조준 하는 순간, 어느새 그는 다리뼈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폭삭 침몰해 버렸다.
자명종의 요란한 울음에 강성규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땀 투성이었다. 악몽 뒤에 오는 몸서리를 전신에 느끼며 그는 자명종의 시계를 보았다. 6시였다.
밖은 벌써 환해 있었다. 설악산 연성장으로 가는 휴가버스가 본점 주차장에서 7시에 출발한다고 했지—-. 여름휴가를 떠나는 이 즐거운 아침에 하필이면 훈련병시절의 꿈이라니—. 찝찝했다. 분명 길몽은 아닐 테고—
꿈 생각을 떨쳐 버리기나 할 듯 그는 세면 실에서 푸더덕 푸더덕 물소리를 내며 얼굴을 씻었다. 한결 개운했다. 수건으로 대충대충 얼굴을 닦는 순간 세면 실 벽에 걸린 달력에서 요염하게 웃고 있는 비키니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곧게 뻗은 각선미에 그는 침을 삼켰다.
미스 김도 저만큼은 될 거라—
그는 괜히 기분이 좋아 흐믈흐믈 웃었다. 얼굴이 오동통하면서도 몸매 날씬한 미스 김의 전신이 자꾸만 시야에 클로즈업 되어 왔다.
아. 이 날. 이 기회를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설악산에 휴가 가서 참한 색시 감이나 하나 구해 오소”
하숙집 아줌마의 의미 있는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그는 택시로 K은행 본사에 도착했다. 출발 30분 전 인데도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들뜬 모습들이었다.
“강성규씨는 애인도 없나? 어찌 혼자여?”
30대 중반에 벌써 똥배가 나온 직장상사 공 대리가 왼팔로는 서너 살 가량의 계집애를 안고, 오른 팔로는 대 여섯 살 정도의 사내애 손을 잡고 뒤뚱거리면서 다가왔다. 뒤이어 두루뭉실하게 생긴 그의 부인이 쫓아 왔다. 공 대리는 그의 아내를 소개했다. 강성규는 꾸벅 절하는 그의 부인을 보고 내심 고소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공 대리는 늘상 그더러 30넘은 노총각은 ** 반 쪽 밖에 없는 남자라고 놀려대었었다. 남자는 장가를 빨리 가야 생활이 안정되고 출세에도 신경을 쓸 수 있다고 떠들었었다.
그래 봐야 보리숭늉 같은 밍밍한 여잘 데리고 살면서 뭘—
강성규는 3박 4일 동안의 날씨걱정을 하는 공 대리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고 K은행 Q지점 저축예금 계 텔러인 김성미를 찾았다.
“오빠하고 부모님이랑 같이 왔어요.”
3박 4일 동안 미스 김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출발할 때 주차장에서 같이 온 남자 한 사람과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을 어떤 관계냐는 강성규의 질문에 대답한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녀가 산으로 가면 그도 산으로, 바다로 가면 바다로 졸졸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냉랭했다. 금년 초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그녀에게 강성규는 첫눈에 반했었다. 그녀는 늘 그에게 친절했다. 살결이 무척이나 고운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자연히 그는 별 볼일도 없으면서 Q지점을 들락거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너무 잦다 보니 주변 직원들에게 눈총을 받았다. 그래서 근처 다방으로 가서 전화로 불러내곤 했었다. 그녀도 싫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찔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다가 왔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강성규는 철석 같았다.
그녀가 이번 여름휴가에 K은행에서 직원들을 위해 운영하는 설악산 연성 장으로 8월 초순 휴가를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자 그는 내심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사실 업무시간 중이나 점심시간에 가끔 만나는 것으로는 그의 좋아하는 속내를 그녀에게 들어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주말에나 휴일에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녀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도리 없이 업무시간 깎아 먹는 도둑 데이트나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여름휴가를 목 빠지게 기다렸던 것이다.
“무얼 그리 맛있게 많이 들었어요? 꼭 공대리 같이 배가 나왔네.”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그는 소득 없이 휴가가 끝이 나는 게 안타까웠다. 그는 마침내 체면불구하고 그녀가 묵고 있는 숙소 방문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온 그녀에게 던진 한마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할만한 소리가 아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강성규씨. 휴가 잘 보냈어요?”
“잘 보냈는지 못 보냈는지는 미스 김이 더 잘 아실 텐데.”
그녀는 그의 대답에 잠시 머뭇 했다. 그리곤 이내 묘한 웃음을 짓더니 숙소에 대고 사람을 불렀다.
“여보. 이리 잠깐 나와 보세요.”
강성규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여보 라니? 결혼을 했단 말인가? 분명 Q지점 사람들은 그녀를 “미스”로 호칭 했었는데.
싱글싱글 웃으며 나온 그녀의 ‘여보’는 강성규를 보자 손을 덥석 잡았다.
“반갑습니다.”
“미스 김의 오빠가 아니시던가요?”
‘미안합니다. 남자가 마누라 덕에 피서 간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아내더러 오빠라고 부르라 시켰지요. 아낸 지금 임신 5개월입니다. 아내가 입사하고 바로 결혼했고 사실, 은행에는 알리지 않았어요. 아시잖아요. 미혼 여사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기혼자보다 훨씬 많이 주어진다는 것— 그래서 아내는 당분간 그 사실을 숨긴 거지요. 그나저나 나 몰라보겠어요?“
그녀가 임신 5개월이라는 얘기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이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생판 본 적 없는 사람이 나를 모르겠느냐고 하니.
그러나 미스 김의 남편은 허물어져가는 강성규의 가슴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197*년도에 30연대에서 훈련병 조교를 했었죠. 형씨가 하도 고문관 노릇을 해서 조교들 사이에서 유명했죠. 나는 아직까지 형씨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좀 특별했던 훈련병들의 얼굴은 오래 기억하는 편이지요. 그런데 형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아내가 기혼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혼자 그렇게 좋아하셨다니—” (끝)